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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박진이 기획초대전 "치유적 풍경-Dream 등록일 2020.10.08 21:37
글쓴이 관리자 조회/추천 1612/2

(작가노트)

 

 

꽃의 피어남을 통하여 한 생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스러짐을 통하여 생명의 순환을 성찰케 한다.

 

치유적 풍경-Dream“의 작품은 늘 지나던 길가의 생명을 주제로 일상의 일기를 쓰듯 표현한 작품이다. 자연을 통해 상생과 합일을 꿈꾸며, 인간의 삶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미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대상을 통하여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작가의 인생관이 상징적, 의미를 담게 된다. 내 삶 속의 긴장감과 희망은 자연을 통해 매개가 되고 스스로 반성하고 탄력성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담아 보았다.

 

요즈음 앞만 보고 걸어가는 현대인들은 물리적 욕망을 쫓다보면 소소한 일상을 잊고 산다.

코로나19로 지쳐있는 모든 이에게 자연 속에서 얻는 소중한 힐링으로 치유 에너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평론)

 

 

빛으로 온 신록을 마주하며

 

이재언 (미술평론)

황량한 벌판에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온기 있는 쾌락주의를 선택한 데는 나름 기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미학적 결단이 있었다. 얼었던 땅에 불과 하루 치 햇살만으로도 새싹이 올라오는 이 경이로운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은 그리기가 아니다. 자연에 바치는 제의에 더 가깝다.

 

박진이는 어린 싹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아기살같이 부드럽고 티 없이 맑은 신록을 마주했을 때의 흥분과 기쁨을 화폭에 새긴다. 신록의 잎사귀에 화려한 꽃은 사족이다. 그 자체가 오묘한 심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뿌리로부터 줄기를 타고 막 올라온 수액이 표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촉촉함과 청초함,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빛으로 열린 세상 / 흰 여백 속으로 흐르는 / 생명의 강김월수 시인이 작가의 그림을 보고서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이 분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화면 아래 생명의 수맥이 흐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소한 소재지만, 이는 빛으로 열린 세상이 맞는다. 잿빛 하늘 아래 살아야 하는 요즘, 한 줄기 빛과 청량한 바람으로 다가오니 더 반갑지 않은가.

 

 

편집된 자연, 뒤란의 페이소스

작가 김관수

 

자극적인 이미지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눈여겨보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잉여의 삶에서는 아주 작은 일상도 때로는 운명처럼 거부 할 수 없는 치명적 관계로 다가 온다.

 

봄날, 토방 끝에 피어있는 민들레는 향기도 꿀도 없다.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아도 이듬해 봄 지천에 널려있는 꽃이 민들레다. 학명이 타라사콤으로 시작하는 이 꽃은 번식을 위해 그 씨를 가볍게 하여 바람에 날린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작가는 현실에서는 한 발 물러서있는 사람들이다. 물러서있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떨어져있다는 것. 현실과 다른 영역이라면 그 곳은 어디인가. 사실, 그곳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역이다. 다만 존재너머의 현실이기에 보이지 않을 뿐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치열한 구도의 길에서 삶의 원형과 시원에 대한 성찰로 지난한 삶을 감내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작가가 추구하는 다른 종류의 현실, 그것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의 세계, 자신의 세계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도달하는 치명적 아름다움을 위해 자연과 문명, 그 경계에 걸쳐있는 사람들이다. 자연과 문명, 상반된 개념이지만 최초 인류는 대자연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파노라마에서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그 공포는 인류를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공포를 희석시키기 위해 서정이라는 체념적이고 가식적이자 몽환적인 환상 뒤로 숨어 도피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비켜서 생각하고 은근한 메타포라 수사로 애써 직설적인 수사를 꺼리는 것이 그것이다.

 

동양의 미학 저자 킴바라 세이고비워 쓸쓸하게 남은 공간에서 비로소 슬픔이 스며든다고, 그 알 수 없는 슬픔의 시원과 정체를 더듬어가는 지난한 여정이 예술이 해야 하는 작은 소명 같은 것이라고했다. 예나 지금이나 편집된 자연에서 부터 삶의 원형, 시원을 유추해내려는 지난한 노력이 예술의 소명으로 회자되는 이유다.

 

작가 박진이 작업은 편집된 자연의 단편적 해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격한 감정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떠나간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판단은 변한다. 들고나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일상은 단조롭다. 번잡스러운 현전의 아우라에서 그녀의 편집된 자연은 담담하게 다가온다. 들판이나 호젓한 산모퉁이를 돌면 불쑥 나타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나 들풀,

모란과 쉿땅나무,작은 풀 한포기의 떨림에서 불안한 현실과 시대적 아픔이 묻어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망울에서 작은 희망과 치유를 상상해 본다. 그녀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치유적 장치는 채움과 비움 사이 작은 감성의 편린들이 잔잔한 페이소스를 품은 여백이 아닐까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여백은 나른한 봄날 창가에 스며든 햇볕처럼 일상에 닿아 있다. 무성한 잎들로 채워진 번잡함을 희석시키는 비움의 공간이자 뒤란의 여운이 묻어난다. 텅 비어있는 순백의 공간은 완성을 지향하는 현재진행형인 동양화에서 매우 중요한 관자와의 소통창구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유를 덜어내기 위한 공간이자 관자의 몫이기도 한 그녀의 여백은 그래서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타버려 이제 탈 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즉 무욕의 경지요 시각적인 다양성을 최소화하고 극적인 단조로움에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도에서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 본다.

거대 담론에 현혹되기 쉬운 요즘, 작은 떨림에 천착하는 그녀의 작업에서 삶의 기저를 반추해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진실한 담론이지 않을까 한다.